In Praise of Walking / Shane O'Mara

20191129_143346.jpg

철학을 좋아해서 철학으로 박사까지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학부 때부터 혼자서 혹은 누군가와 함께 학교 주변을 걷길 좋아했습니다. 정확한 말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게 걷고 나면 안 풀릴 것 같은 문제가 풀릴 때가 많다는 것이 공부하다가 잠깐 짬을 내 그렇게 걷는 이유였습니다.

이 친구와 달리 저는 학부 때 걷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집에서 맨몸 운동 정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13년 가을 지리산 천왕봉을 2박3일로 종주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돼 결혼하기 직전인 2016년까지 햇수로 4년을 산에 미쳐서 살았습니다. 산에서 누군가와 함께 오래 걷는 것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해지는 느낌을 산에 갈 때마다 받곤 했습니다.

결혼 이후에는 산에 못 가게 됐지만 여전히 걷는 것을 즐기고, 평일에는 거의 매일 회사 주변을 걷습니다. 이전 직장에선 동료 선생님과 운동에 뜻이 맞아 같이 회사 주변을 많이 걸었고 지금은 혼자서 열심히 걷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지하철까지 1.5km 정도 되는데 출퇴근 시 이변이 없으면 거의 99% 걸어 다닙니다.

30개월 이하인 아이가 둘인 사람으로서 라이딩도 못 하고 산에도 못 가고 헬스장도 못 가니 결국 할 수 있는 유일한 운동이 일상에서의 걷기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걷기 예찬론자가 됐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고 무리하다가 다칠 일도 없는 게 걷기입니다. 꾸준한 걷기는 다른 운동만큼이나 생활에 활력과 건강을 선물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접근성과 안전성뿐만 아니라 효율이 아주 좋습니다.

걷기를 즐기다 보니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이 책에 관한 기사를 봤을 때 너무 매혹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바로 책을 질렀습니다.

183페이지 분량이지만 원서다 보니 다 읽는데 세 달 걸렸습니다. 저자인 Shane O'Mara가 신경과학자다 보니 책에 뇌와 관련한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옵니다. 책 읽는 게 더딜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걷기의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에 관한 3장과 4장의 덤불숲을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좀 수월해집니다.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는 핵심은 지금 당장 시간을 내 걸으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몸은 진화론적으로 걷기에 최적화돼 있고 걷기를 통해 뇌를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니 꾸준히 걷는 것이 이득입니다. 영유아의 발달 과정만 놓고 보더라도 걷기 시작하는 12개월을 전후로 하여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데 뇌가 그만큼 효율적으로 활성화되는 양상과 관련 있을 것입니다.

걷지 않으면 뇌가 퇴화하며 다양한 신체적 및 심리적 증상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치매가 오더라도 보호자와 꾸준히 산책하는 분들은 집에서 누워만 계신 분들에 비해 병의 진행 속도가 더디고 더 활기 차 보인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걷기의 예방효과에 관한 다양한 논문이 6장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 중 3만3천 명의 데이터를 활용한 11년 간의 전향적 코호트 연구는 다른 혼입변인을 통제했을 때 일주일에 한 시간 가량의 운동이 우울증 발생 가능성을 평균적으로 12% 정도 낮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울증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요인이 있기 때문에 12%라는 수치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7장을 살펴보면 걷기는 창의적 사고와도 관련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최근 듣게 된 하지현의 이 오디오클립도 비슷한 내용입니다.) 글 서두에 언급한 제 친구는 경험을 통해 깨우친 사실이겠지만 이와 관련한 연구들이 많이 있고, 논란이 있는 부분도 있으나 비교적 일관된 결과가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걷기는 백일몽이나 꿈과 같은 느슨한 의식 상태를 만들어서 경직된 사고 틀로부터 벗어나 문제를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인지적 능력을 향상시킨다고 합니다. 간과했던 주요 정보들이 의식의 전면으로 나오기 쉬운 상태가 됩니다. 이는 문제가 잘 안 풀릴 땐 책상에서 일어나 걸으라는 의미입니다. 걷는 순간 혹은 걷고 난 이후 의외의 지점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늘 그런 건 아니겠지만 최소한 문제해결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 아닐까 합니다.

8장은 걷기의 사회적 측면에 관한 내용입니다. 함께 걷는 것이 사회적 유대를 강화한다는 내용입니다. “Social walking manifests itself in many other positive and powerful ways, and is crucial to creating or maintaining social cohesion at an intimate one-to-one scale, and for wider society.(167-68쪽)” 대규모의 집회나 록페스티벌 등에 참여해 보신 분이라면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와닿을 것 같네요. 국가의 부패한 수뇌부는 민중이 들고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집회나 행진에 제약을 가하고 광주민중항쟁이나 지금 홍콩의 처참한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때로는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탄압을 일삼습니다. 부패 권력에게 함께 걸으며 단합하는 민중만큼 무서운 게 없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2017년부터 걷기의 인문학이란 책을 오랜 기간에 걸쳐 읽었습니다.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이 버겁고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반면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소개되는 신경과학자의 걷기 예찬론은 한결 명쾌하고 재밌게 느껴집니다. 상대적인 느낌이라 누군가는 걷기의 인문학에 한 표를 줄 수도 있겠죠. 아무튼 누가 이 책 번역 좀 해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