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궁전 / 폴 오스터
이십대 초반에 한 번 읽었던 책인데 너무 오래 전이라 내용을 다 잊어버렸네요.
이동진의 빨간책방 팟캐스트에서 이 책이 소개되는 것을 듣고 다시 읽어야겠다고 다짐한 게 9월 무렵이었는데 이제서야 다 읽었습니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보단 덜하지만 이 책 역시 전체 분량의 1/3 정도까지는 도대체 무슨 얘기가 펼쳐질지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전체 줄거리에 대한 이해나 이 책에 대한 배경이 없이 무작정 읽게 되면 좀 복잡하게 느껴지거나 답답할 수 있습니다.
빨간책방을 통해 주요 스토리를 파악한 상태에서 읽으니 인물 각각의 생각 및 감정에 더 몰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는 면이 있었습니다. 이 책을 다 읽는 데 무려 3달이 걸린 이유입니다.
포그라는 인물이 주인공인데, 스스로의 신념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내몬다는 점에서 죄와 벌의 주인공 라주미힌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라주미힌이 스스로가 추구하는 선을 구현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면 포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자기정의의 과정에서 빈곤과 노숙을 자초합니다. 물론 이것은 의식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혈육이었던 외삼촌의 죽음은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모는 가운데 자신의 근원(꿈, 욕망, 감정, 신념 등)을 탐색하게 만듭니다.
거리 생활을 청산하고 에핑의 자서전 집필을 돕게 되면서부터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달의 궁전은 포그라는 인물이 자기를 구성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포그에게 술회하는 에핑의 자서전적 기억 역시 에핑 자신의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포그라는 사람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왜 그런지 밝히면 스포일러라..).
솔로몬 바버의 등장으로 정체성의 퍼즐이 완성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분노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 분노가 비극을 초래합니다.
자신을 알아간다는 것은 늘 유쾌하지만은 않습니다. 포그가 경험했던 것처럼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고통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중 하나가 부인이나 회피입니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그럴 리 없는데..', '이건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부인하고 싶은 내 모습조차 수용할 수 있을 때 인식의 지평이랄 만한 것이 확장되는 것 같습니다. 어린 아이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기중심성에서 서서히 탈피하듯이 나와 타인과 세상을 조금은 더 다양한 견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소설 말미에 포그가 태평양에 도달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포그에게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을 예감하게 됩니다. 석양이 질 때까지 태평양을 바라보는 포그의 모습에서 분절된 과거와 기약 없던 미래가 응집력 있는 하나의 서사로 통합되며 활기를 띠게 되는 이미지를 떠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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